맨위로가기

뉴욕 코스모스 (1970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뉴욕 코스모스는 1970년 설립된 북미 축구 리그(NASL)의 축구 클럽으로, 1970년대 후반 펠레, 프란츠 베켄바우어 등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72년, 1977년, 1978년, 1980년, 1982년 NASL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리그 최강팀으로 자리 잡았으나, 1980년대 중반 쇠퇴하여 해체되었다. 이후 2010년 재창단되어 북미 사커 리그에서 활동하다가 해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뉴욕 코스모스 (1970년) - 자이언츠 스타디움
    자이언츠 스타디움은 뉴저지주에 위치했던 다목적 경기장으로, 1976년에 개장하여 2010년 철거될 때까지 뉴욕 자이언츠와 뉴욕 제츠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었고, NFL 경기, FIFA 월드컵, 문화 행사 등을 개최하다가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으로 이전되었다.
  • 1985년 해체된 축구단 - 부로바 SA
  • 뉴욕주의 축구단 - 웨스턴 뉴욕 플래시
    웨스턴 뉴욕 플래시는 USL W-리그, WPS, WPSL 엘리트, NWSL, UWS 등 여러 리그에서 활동하며 2010년 USL W-리그 챔피언십, 2011년 WPS 챔피언십, 2012년 WPSL 엘리트 챔피언십, 2016년 NWSL 챔피언십 우승, 2013년 NWSL 쉴드 획득 등 성공적인 역사를 가진 미국의 여자 프로 축구팀이었으나, 2016년 우승 후 프랜차이즈 권한 매각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커리지로 팀명을 변경했다.
  • 뉴욕주의 축구단 - 로체스터 뉴욕 FC
    로체스터 뉴욕 FC는 뉴욕주 로체스터를 연고로 1996년 창단하여 USL 리그를 거쳐 MLS 넥스트 프로 리그에 참가했던 프로 축구 클럽으로, US 오픈컵 우승과 USL 챔피언십 우승을 기록했으나 2023년 운영을 중단했다.
뉴욕 코스모스 (1970년)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뉴욕 코스모스 77
뉴욕 코스모스 77 엠블럼
별칭코스모스
정식 명칭뉴욕 코스모스
과거 명칭코스모스 (1977–78)
창단1970년 12월 10일
명칭 확정1971년 2월 4일
해체1985년
경기장경기장 참고
리그북미 축구 리그
주요 실내 축구 리그
마지막 시즌1984년
최종 순위동부 디비전 3위
웹사이트없음
미국 팀 여부
유니폼
pattern_la1: _greenborder
pattern_b1: _green_spread_collar
pattern_ra1: _greenborder
leftarm1: FFFFFF
body1: FFFFFF
rightarm1: FFFFFF
shorts1: FFFFFF
socks1: FFFFFF
원정pattern_la2: _whiteborder
pattern_b2: _white_spread_collar
pattern_ra2: _whiteborder
leftarm2: 006600
body2: 006600
rightarm2: 006600
shorts2: ffffff
socks2: 006600

2. 역사

뉴욕 코스모스는 1970년에 창단되어 1985년까지 존속했던 미국의 프로 축구 클럽이다.

1970년 애틀랜틱 레코드사의 사장 아흐메트와 네수히 형제가 중심이 되어 뉴욕 코스모스를 창단했다. 이들은 모회사 워너 커뮤니케이션스의 지원을 받아 팀을 운영했다. 팀 이름은 뉴욕 시민들을 의미하는 '코스모폴리탄'에서 유래했으며, 뉴욕 메츠의 '메트로폴리탄'에서 힌트를 얻었다.[5]

1971년 북미 축구 리그(NASL)에 참가하여 프로 리그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양키 스타디움과 호프스트라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랜디 호턴 등의 활약으로 1972년 리그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 브라질의 축구 영웅 펠레를 영입하면서 코스모스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펠레의 합류는 미국 축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코스모스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조르지오 키날리아, 프란츠 베켄바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레스 등 세계적인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며 1977년, 1978년, 1980년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1977년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는 77,691명의 관중이 운집하여 미국 클럽 축구 최다 관중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펠레가 1977년 10월 펠레의 은퇴 경기에서 연설을 마친 후 동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그를 위로하며 울고 있다.


1977년 펠레의 은퇴 이후, 코스모스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모기업 워너 커뮤니케이션스의 경영 악화와 북미 축구 리그의 인기 하락이 겹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초, 워너는 호주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의 적대적 인수 시도에 직면했고, 결국 아타리 등 여러 자산을 매각했다. 코스모스 역시 조르지오 키날리아에게 매각되었지만, 스타 선수들을 유지할 자금 부족으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팀을 떠났다.

1982년 마지막 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코스모스는 1984년 북미 축구 리그가 해체될 때까지 리그에 참가했다. 이후 메이저 실내 축구 리그에서 잠시 활동했지만, 1985년 결국 해체되었다.

2010년, 뉴욕 코스모스는 영국 사업가 폴 켐슬리에 의해 재창단되었다. 새로운 코스모스는 북미 사커 리그와 내셔널 인디펜던트 사커 협회(NISA)에서 활동했다.

2. 1. 창단과 전성기 (1970-1980년대 초)

에르테군 형제, 아흐메트(왼쪽)와 네수히(오른쪽)는 스티브 로스와 함께 코스모스를 공동 창립했다.


1970년 12월, 뉴욕 코스모스는 애틀랜틱 레코드의 임원이었던 아흐메트와 네수히 형제에 의해 설립되었다.[5] 1972년 4월, 그들의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스가 코스모스를 인수했다. 팀의 첫 번째 영입은 영국인 클라이브 토예였는데, 그는 스포츠 기자 출신으로 196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볼티모어 베이즈의 단장을 지낸 경험이 있었다. 토예는 뉴욕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아 팀의 이름을 뉴욕 메츠 야구팀의 "Metropolitans"를 능가하는 "Cosmos"(코스모스, "Cosmopolitans"의 축약형)로 정했다. 그러나 에르테군 형제는 "New York Blues"를, 다른 소유주는 "New York Lovers"라는 이름을 선호했다.[5] 토예는 3,000개의 응모작을 받은 "팀 이름 짓기" 대회를 열었고, 퀸즈의 마틴 반 뷰렌 고등학교 체육 교사 두 명(마이어 딜러, 알 카펠리)이 제출한 "Cosmos"가 선정되었다. 이들은 유럽 여행 상품을 받았다.[6] 팀 이름은 1971년 2월 4일에 공식 발표되었다.[2][7][8]

뉴욕 코스모스는 1970년에 북미 축구 리그(NASL)에 참가하여 1971년 리그 네 번째 시즌에 데뷔했다. 첫 선수 계약은 1963년 북미로 이주하여 1968년 뉴욕 제너럴스에서 뛰었던 잉글랜드 프로 선수 고든 브래들리였다.[9] 그는 선수 겸 코치로 1975년까지 활동했다.[9] 브래들리가 이끈 팀은 첫 해에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르며 디비전 2위를 차지했다. 버뮤다 출신의 랜디 호턴은 16골 37포인트로 리그 신인상을 수상했다.[11][10] 1972년 팀은 호프스트라 스타디움으로 옮겨 세인트루이스 스타스를 2-1로 꺾고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호턴은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에서 9골 22포인트를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이자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1] 코스모스는 1973년에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탈락했다.[50] 브래들리는 1973년 6경기에 걸쳐 미국 국가대표팀을 감독했지만, 미국 시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경기에 선수로 출전하여 모두 패했다.[9][12][13] 1974 시즌 전에 코스모스는 랜들스 앤 워즈 아일랜드의 다운잉 스타디움으로 옮겨 정착했지만, 디비전 최하위를 기록했다.[50] 호턴은 1975년 워싱턴 디플로매츠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매 시즌 코스모스에서 최고 득점을 기록했다.[11]

1975 시즌, 코스모스는 브라질 스타 펠레[14]를 영입했다.[43] 스티브 로스는 축구에 관여하기 전까지 펠레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토예가 펠레의 인기를 교황에 비유하자 이적료를 지불하기로 했다. 펠레는 1975년 6월 10일, 140만 달러(당시 운동선수 최고 연봉)를 받고 코스모스에 합류했다. 펠레의 세금을 줄이기 위해 여러 계약이 체결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워너 자회사인 애틀랜틱 레코드와의 "레코딩 아티스트" 계약이었다. 토예는 "우리는 그를 완전히 소유했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또한 1975년에 마이크 딜런을 영입했다.[40]

펠레와의 계약은 "세기의 이적"으로 묘사되었다.[15] 그의 합류는 코스모스를 외국인, 세미 프로 선수, 학생들의 잡동사니에서 거대한 상업적 존재로 변화시켰다. 펠레의 뉴욕 데뷔전은 CBS에서 방송되었고, 경기장에는 녹색 페인트가 칠해졌다. 댈러스 토네이도와의 이 경기는 22개국에 방송되었고, 전 세계 300명 이상의 기자들이 취재했다.[40][15]

뉴욕은 시즌을 3위로 마쳤지만, 포스트 시즌에는 진출하지 못했다.[50] 1976 시즌을 앞두고 브래들리는 켄 퍼피로 교체되었고, 퍼피는 펠레와 S.S. 라치오에서 새로 합류한 이탈리아 국가대표 공격수 조르지오 키날리아를 투톱으로 기용했다. 키날리아는 라치오에서 매우 인기가 많아서 뉴욕 이적 소식에 지지자들이 "비행기 바퀴 아래로 뛰어들겠다고 위협"할 정도였다.[40] NASL 팀들이 영입한 대부분의 해외 스타들과는 달리, 키날리아는 전성기에 계약했다.[40] 그는 코스모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코스모스와 리그 전체에서 최다 골과 득점 기록을 세웠다.[50] 그는 구단 관리자 로스와 특별한 유대감을 가졌고, 펠레를 포함한 다른 선수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40]

이들과 다른 유럽 및 남미 국가대표 선수들의 합류로 관중이 늘어나 1976 시즌에는 양키 스타디움으로 다시 이사했다.[50] 코스모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탬파베이 로우디스와의 지구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했다.[50] 코스모스는 1977 시즌 전에 자이언츠 스타디움으로 다시 이전했고, "뉴욕"이라는 접두사를 삭제하고 "코스모스"로 활동했다. (1979년에 도시 이름 복원)[50][16]

브래들리는 해임된 퍼피를 대신하여 1977 시즌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시즌 중반에 구단의 선수 담당 부사장으로 임명되면서 물러났다.[9] 남아프리카 출신 에디 퍼마니가 그를 대신했다.[9] 펠레는 1977년 10월 1일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만원 관중 앞에서 마지막 프로 경기를 치렀다.[40] 뉴욕과 산투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펠레는 양 팀 모두를 위해 출전하여 각 팀에서 한 경기를 뛰었다. 코스모스는 이 경기에서 2-1로 승리했다.[40] 펠레의 동료이자 전 브라질 주장인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레스와 1974년 FIFA 월드컵 우승 서독 대표팀 주장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워가 1977년에 계약했다. 펠레의 활약과 함께 뉴욕은 1977년, 1978년, 1980년에 4번의 챔피언십에서 3번 우승했다. 1977년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는 77,691명의 관중이 모여 미국 클럽 축구 기록을 세웠다.[40] 1970년대 후반에 정기적으로 4만 명 이상을 기록한 팀의 평균 관중 수는 리그에서 가장 컸으며,[50] 이는 상업적으로나 경쟁적으로 리그의 "주요 클럽"으로 여겨지는 데 기여했다.[9] 퍼마니는 1979년에 해고되었는데, 그는 키날리아와 불화한 후 해고되었다고 주장했다.[62] 그의 조수였던 레이 클리베카가 그를 대신하여 팀의 첫 미국인 감독이 되었다. 그는 한 시즌 동안 감독을 맡은 후 훌리오 마제이로 교체되었다.[17]

1977년 펠레의 은퇴 투어에서 코스모스는 중국에서 경기를 치른 최초의 서구 프로 스포츠 팀이 되었다.[18] 그들은 중국 국가대표팀과의 첫 경기에서 1-1로 비겼고, 펠레가 프리킥 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경기에서 2-1로 패했다.[19]

2. 2. 쇠퇴와 해체 (1980년대 중반)

1977년 펠레의 은퇴 이후, 미국 축구는 펠레가 활약하는 동안 이룩했던 상당한 진전을 잃었다. 북미 사커 리그(NASL)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 스타는 펠레를 대체할 수 없었다.[15] 1970년대 후반 잠깐의 부침을 겪은 후, 1980년 이후 관중 수는 감소했고, 스포츠의 인기는 하락했으며, 언론의 관심도 식었다.[15] NASL 경기를 중계하기 위한 ABC와의 계약도 1980년에 종료되었고, 1981년 사커볼은 녹화 중계로만 방송되었다.[39] 모든 구단은 빠르게 적자를 기록했고, 1984 시즌 전에 시행된 급여 상한제는 불가피한 상황을 잠시 늦추는 역할만 했다.[39] 리그는 대부분의 구단을 잃은 후 1984년 말에 해산되었다.[50][39][20]

코스모스는 리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 외에도 자체적인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코스모스가 영입한 유명 해외 선수들을 유치할 수 있었던 능력은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스의 재정적 자원 덕분이었다. 1980년대 초, 워너는 호주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의 적대적 인수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비록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워너는 아타리와 코스모스를 운영하는 자회사인 Global Soccer, Inc.를 포함한 여러 자산을 매각했다. 조르지오 키날리아는 Global Soccer를 인수하여 팀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의 그룹은 워너가 비싼 계약으로 계약한 모든 선수들을 유지할 자본이 부족했고, 그 결과 많은 스타 선수들이 매각되었다. 클럽은 1982년에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고, NASL의 마지막 시즌인 1984년에는 1975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50] 1983년 시즌 이후 코스모스의 급격한 몰락은 많은 팬들과 언론에게 NASL 전체의 심각한 상태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50][20]

NASL이 붕괴된 후, 팀은 1984-85 시즌 동안 메이저 실내 축구 리그에서 경쟁했으며, 훌리오 클리베카가 잠시 코치로 복귀했지만, 저조한 관중으로 인해 33경기 후 철수했다. 이 조직은 1985년에 독립 팀으로 운영하려 했지만, 한 시즌도 마치지 못하고 결국 해체되었다.

2. 3. 재창단 (2010년)

1985년 오리지널 뉴욕 코스모스 클럽이 해체된 이후, 이를 부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메이저 리그 사커(MLS)가 부상하면서, 메트로스타/뉴욕 레드불스의 두 다른 소유 그룹을 포함한 다양한 뉴욕 지역 단체들이 코스모스 이름 인수를 위해 페페 핀톤에게 로비를 벌였다.[29] 핀톤은 MLS 팀에 판매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MLS가 코스모스의 유산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30] 하지만 샌호세 어스퀘이크스, 시애틀 사운더스, 포틀랜드 팀버스 및 밴쿠버 화이트캡스와 같은 옛 NASL 팀들이 MLS 프랜차이즈로 부활하면서, 그는 재고했다.[31] 그는 2009년 코스모스 이름과 브랜드를 영국 사업가 폴 켐슬리에게 매각했고, 그의 그룹은 2010년 8월 코스모스 이름을 딴 새로운 팀을 발표했다.[32]

켐슬리와 다른 소유주들은 처음에는 MLS 확장 프랜차이즈가 되려고 했지만,[33] 결국 신청 초대를 거절했다.[34] 켐슬리의 팀은 대신 새롭게 출범한 2부 리그 북미 사커 리그에 합류하여 2013년 가을 시즌에 경기를 시작했다.[35][36] 이 팀은 리그가 해체되기 전까지 다음 4시즌 동안 경기를 치렀다. 코스모스는 그 후 3부 리그 내셔널 인디펜던트 사커 협회(NISA)에 합류했지만, 휴식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반 시즌만 경기를 치렀다.[37][38]

3. 경기장

뉴욕 코스모스는 초기에 양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50] 1971년 시즌 동안 뉴욕 양키스 야구팀과 뉴욕 자이언츠 미식축구팀의 홈 구장이었던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렀으나, 평균 관중 수는 4,517명으로 저조했다.[50]

1972년 시즌에는 호프스트라 대학교 캠퍼스 내에 있는 호프스트라 스타디움으로 이전했으나[50] 외곽 지역에서의 관중 수는 여전히 적었다.[50]

1974년 시즌에는 랜들스 앤 워즈 아일랜드에 있는 다운링 스타디움으로 다시 홈 구장을 옮겼다.[50] 펠레와 같은 스타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1975년부터 관중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15]

1976년 시즌에는 다시 양키 스타디움으로 돌아왔고, 평균 관중 수는 18,227명으로 크게 증가했다.[50]

1977년 시즌부터는 새로 건설된 자이언츠 스타디움으로 이전하여 1978년에는 평균 47,856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최고치를 달성했다.[50] 코스모스는 북미 축구 리그에서 활동하는 동안 자이언츠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50] 1980년대 초 리그가 쇠퇴하면서 관중 수는 점차 감소하여 1984년에는 12,817명으로 급감했다.[50]

코스모스 홈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은 1977년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경기로, 77,691명의 팬이 참석했다.[40][51] 이는 당시 미국 축구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었다.[51]

2011년 현재, 호프스트라 스타디움(현 제임스 M. 슈어트 스타디움)만이 남아있다.[52] 다운링 스타디움, 양키 스타디움(1923), 자이언츠 스타디움은 각각 2002년, 2008년, 2010년에 철거되었다.[52][53][54]

코스모스는 실내 축구를 할 때는 브렌단 번 아레나(현 메도우랜즈 아레나)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다.[55]

시즌평균 관중 수[50]경기장
19714,517양키 스타디움
19724,282호프스트라 스타디움
19735,782호프스트라 스타디움
19743,578다운링 스타디움
197510,450다운링 스타디움
197618,227양키 스타디움
197734,142자이언츠 스타디움
197847,856자이언츠 스타디움
197946,690자이언츠 스타디움
198042,754자이언츠 스타디움
198134,835자이언츠 스타디움
198228,479자이언츠 스타디움
198327,242자이언츠 스타디움
198412,817자이언츠 스타디움


4. 유니폼과 엠블럼

코스모스 팀의 초창기 유니폼은 펠레를 미국으로 영입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녹색과 노란색을 사용했다.[43][44] 초기 유니폼은 노란색 테두리가 있는 녹색이었고, 원정 유니폼은 색상이 반전되었다. 이 색상은 1968년 시즌 이후 해체된 이전 뉴욕 NASL 팀인 뉴욕 제너럴스의 색상과 같았다.[50]

1975년에 펠레가 합류하면서 유니폼은 그의 브라질 클럽인 산투스 FC를 따라 모두 흰색으로 변경되었다. 녹색과 노란색 요소는 테두리 장식으로 밀려났다. 녹색 셔츠는 새로운 원정 유니폼을 위해 흰색 반바지와 함께 사용되었다. 랄프 로렌이 디자인한 유니폼은 1979년부터 마지막까지 사용되었으며, 홈 유니폼은 이전 유니폼의 녹색과 흰색 테두리를 대체하는 네이비와 노란색 테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흰색으로 유지되었다. 원정 유니폼은 노란색 테두리가 있는 네이비 셔츠와 반바지가 되었으며, 특이한 노란색과 네이비색 줄무늬 양말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나중에는 단색 네이비색 양말로 교체되었다.[33]

팀의 로고는 애틀랜타 출신의 스포츠 예술가 웨일랜드 무어가 디자인했다. 그는 이미 애틀랜타 치프스의 로고, 유니폼, 프로그램 표지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무어는 단순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으며, 뉴욕의 다양한 국적을 포괄하는 디자인을 만들고자 했다. 중앙에 있는 축구공을 둘러싼 세 개의 색깔 있는 "날"은 움직임을 나타내며, 원래 사용된 글꼴은 유니폼에서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43][45] 로고의 텍스트는 1977년에 팀이 "뉴욕"이라는 표기를 버리면서 "코스모스"로 축약되었다. 도시 이름은 2년 후 복원되었지만, 배지는 변경되지 않았다.

기간유니폼 공급업체비고
1971-1975 Denken Soccer LTD.
1975-1976 챔피언
1977 엄브로(Umbro)
아디다스(Adidas)
에어텍스(Aertex)
Athleta
1978 엄브로(Umbro)
Athleta
애드미럴[48]
1979 애드미럴랄프 로렌 디자인
1980-1984 엘레쎄(Ellesse)
1984 엘레쎄(Ellesse)
아디다스(Adidas)
1985 Ennerre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Average White Band와 애틀랜틱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들을 섭외하여 코스모스의 테마곡을 제작하게 했다. 그 결과, "The Cosmos Theme"은 밴드 멤버인 앨런 고리와 스티브 페론이 작곡했으며, "The Cosmic Highlanders"라는 가명으로 밴드가 녹음했다.[49]

5. 선수

뉴욕 코스모스는 1970년 북미 축구 리그(NASL) 참가를 위해 아흐메트와 네수히 형제에 의해 창단되었다. 팀의 첫 번째 선수 계약은 고든 브래들리였으며, 그는 선수 겸 코치로 1975년까지 활동했다.[9]

랜디 호턴은 뉴욕 선수 중 가장 많은 득점을 올려 리그 신인상을 수상했고,[11][10] 1972년 팀은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호턴은 리그 득점왕이자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11]

1975년, 코스모스는 펠레를 영입했다.[14][43] 펠레는 당시 운동선수에게는 엄청난 연봉인 140만달러를 받고 코스모스에 합류했다. 펠레의 합류는 코스모스를 크게 변화시켰다.[15] 댈러스 토네이도와의 데뷔전은 22개국에 방송되었고 전 세계 300명 이상의 기자들이 취재했다.[40][15]

조르지오 키날리아는 코스모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리그 전체에서 최다 골과 득점 기록을 세웠다.[50] 프란츠 베켄바워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도 코스모스에 합류했다.

코스모스는 1977년, 1978년, 1980년, 1982년에 우승했다.

다음은 뉴욕 코스모스에서 주장 역할을 맡았던 선수들이다.

연도이름국적
1971존 영(John Young)
1972–1975배리 메이
1976–1977키스 에디
1977–1979워너 로스
1980–1983조르지오 키날리아
1984블라디슬라프 보기체비치


5. 1. 주요 선수

뉴욕 코스모스는 많은 유명 선수들을 기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이들은 거의 모두 미국 외 출신이었다.

기간이름비고
1975 모르데하이 슈피글러
1975-1977 펠레1975년 6월 10일, 당시 운동선수에게는 엄청난 연봉인 1400000USD를 받고 코스모스에 합류했다.[40] 그의 합류는 코스모스를 외국인, 세미 프로 선수, 학생들의 잡동사니에서 거대한 상업적 존재로 탈바꿈시켰다.[15]
1976-1983 조르지오 키날리아S.S. 라치오에서 새로 합류한 이탈리아 국가대표 공격수.[40] NASL 팀들이 영입한 대부분의 해외 스타들과는 달리, 전성기에 계약했다.[40] 코스모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코스모스뿐만 아니라 리그 전체에서 최다 골과 득점 기록을 세웠다.[50]
1977-1980, 1982 카를루스 아우베르투펠레의 동료이자 전 브라질 주장.[40]
1977-1980, 1983 프란츠 베켄바워1974년 FIFA 월드컵 우승 서독 대표팀의 주장이었다.[40]
1978-1984 블라디슬라브 보기체비치
1979 마리뉴 샤가스
1979-1980 오스카
1979-1984 안드라니크 에스칸다리안
1979-1984 요한 네이스켄스
1980-1983 훌리오 세사르 로메로
1984 브와디스와프 즈무다
2013 카시와세 사토시
2013 브라이언 메러디스
2013-2015 마르코스 세나
2013-2020 대니 세테라
2014-2017 안드레스 플로레스
2015-2016 라울 곤살레스
2016 니코 크란차르
2016 요한드리 오로스코
2017 아마우리
2017 하비 마르케스
2017 데얀 야코비치
2020 안시 아골리



주목할 만한 미국 선수로는 골키퍼 솁 메싱이 있는데, 그는 1974년 12월 잡지에서 누드 사진을 찍은 후 구설수에 올라 팔렸다가, 2년 후 펠레의 주장에 따라 다시 영입되었다.[57] 코스모스는 또한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국 국가대표 수비수 베르너 로스를 기용했다. 코스모스 선수들 중 다수는 매 시즌 말 리그에서 선정하는 NASL 올스타 팀에 이름을 올렸다.[58][59]

5. 2. 영구 결번

펠레가 코스모스 10번 유니폼을 입고 있다. 이 번호는 그를 기리기 위해 영구 결번되었다.

  • '''10''' – Pelé|펠레pt (공격수(축구)|공격수), 1975–77[61]

6. 감독

야신 외즈데나크tr는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뉴욕 코스모스의 감독을 맡았다.[63] 1970년 클럽 창단 이후, 초대 감독은 1950년대 잉글리시 풋볼 리그 하부 리그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잉글랜드계 미국인 고든 브래들리였다. 그는 1963년 미국으로 이주했다.[9] 브래들리는 선수 겸 코치 역할을 맡아 1975년까지 팀을 이끌었다.[9] 브래들리가 이끈 팀은 1972년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지만, 1974년과 1975년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해고되었다.

그의 후임은 켄 퍼피였다. 퍼피의 코스모스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밴쿠버와의 디비전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배했고, 퍼피는 브래들리를 다시 데려오는 쪽으로 떠났다. 브래들리는 두 번째 임기에서 반 시즌만 감독을 맡고 자문 역할로 승진했다.

에디 피르마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전 이탈리아 포워드였으며, 1977 시즌 중반에 감독직을 맡았다.[62] 그의 스타 군단은 1977년과 1978년 두 차례 연속 소커 볼에서 우승했지만, 1979년에는 내셔널 컨퍼런스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했다. 피르마니는 코스모스 수뇌부의 총애를 받던 조르지오 키날리아와 불화로 인해 해고되었다.[62] 그의 조수였던 레이 클리베카는 피르마니가 1979년 중반에 감독직을 물러나면서 팀의 첫 번째 미국인 감독이 되었다.

클리베카는 1980 시즌 전에 브라질 출신 감독 줄리오 마제이로 교체되었고, 마제이는 그 해 마지막에 코스모스의 네 번째 우승을 차지한 후 1980년 헤네스 바이스바일러와 야신 외즈데나크tr 두 명의 공동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이 듀오가 이끄는 팀은 1981년 NASL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1982년 마제이가 복귀하여 그 해 코스모스와 함께 두 번째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피르마니는 NASL 마지막 해인 1984년에 복귀했지만 코스모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피르마니는 1984-85 시즌 메이저 실내 축구 리그에 팀이 참가했을 때도 감독직을 유지했지만, 시즌 중반인 12월 초에 해고되었고, 골키퍼 후베르트 비르켄마이어의 임시 감독 하에 두 경기를 치른 후 클리베카로 교체되었다. 클리베카는 팀이 경쟁을 중단할 때까지 유임되었다.[21]

이름국적시작종료비고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선수 겸 코치[9]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9]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9]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9] [62]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21]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17]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공동 감독
야신 외즈데나크tr
[63]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공동 감독
[63]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17] [63]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21]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임시 감독[21]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align=left |[21]


7. 우승 기록

수상 내역연도
북미 사커 리그우승1972, 1977, 1978, 1980, 1982
준우승1981
정규 시즌 우승1972,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컨퍼런스 우승1977, 1978, 1980, 1981, 1982
디비전 우승1972, 1978, 1979, 1980, 1981, 1982, 1983
북미 사커 리그 실내준우승1983–84
대서양 챌린지 컵우승1980, 1983, 1984
준우승1981, 1982



뉴욕 코스모스는 북미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단 중 하나로, 5번의 리그 우승과 7번의 정규 시즌 1위를 기록했다.[50][64]

8. 대한민국과의 관계

뉴욕 코스모스는 대한민국과 여러 차례 친선 경기를 가졌다. 1979년 9월 28일 구덕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경기를 가졌는데, 박성화에게 골을 허용하며 0:1로 패배했다.[65] 이틀 후인 9월 30일에는 동대문운동장에서 다시 대한민국 대표팀과 경기를 가졌고, 키나글리아가 2골을 넣었지만 허정무, 이정일, 박성화에게 골을 허용하며 2:3으로 패배했다.[65]

1982년에는 대한민국과 미국외교 관계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했다.[65] 10월 28일 전주 경기장에서 대한민국 대표팀과 경기하여 네이스켄스와 보기체비치의 득점으로 강신우가 득점한 대한민국 대표팀에 2:1 승리를 거두었다.[65] 10월 30일에는 마산 경기장에서 대한민국 대표팀과 다시 경기를 가졌고, 키나글리아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65]

날짜경기장상대결과점수득점자
1979년 9월 28일구덕운동장, 부산 대한민국0–1KOR: 박성화
1979년 9월 30일동대문운동장, 서울 대한민국2–3NYC: 키나글리아 (2)
KOR: 허정무, 이정일, 박성화
1982년 10월 28일전주 경기장, 전주 대한민국2–1NYC: 네이스켄스, 보기체비치
KOR: 강신우
1982년 10월 30일마산 경기장, 마산 대한민국1–0NYC: 키나글리아


9. 문화적 영향

펠레가 1975년 코스모스에 합류했을 때, 미국 축구는 "느리고 고통스럽고 거의 주목받지 못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15] 이 스포츠는 대부분의 미국 언론으로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중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경기는 종종 거의 빈 관중 앞에서 치러졌고, 언론의 보도는 미미했다.[15] 코스모스와의 펠레 계약은 미국 전역의 축구를 거의 즉각적으로 변화시켰고, 코스모스뿐만 아니라 NASL과 축구 전반에 신뢰성을 부여했다. 브라질 선수의 합류 며칠 만에 증가된 언론의 관심으로 인해 코스모스의 사무실 직원은 5명에서 5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축구는 농구, 야구, 미식축구와 같은 더 전통적인 "미국" 스포츠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특히 코스모스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클럽이 되었으며, "세계 축구에서 가장 화려한 팀" 또는 ESPN 작가 데이비드 허시의 말대로 "축구의 반신"이 되었다.[15]

NASL의 대표팀이었던 코스모스는 "축구와 쇼 비즈니스의 넥서스"를 구현했으며, 워너 커뮤니케이션스의 가장 문화적으로 눈에 띄는 자산이 되었다.[40][15] 펠레가 뉴욕과 계약한 후, 많은 다른 유럽 및 남미 스타들이 NASL 팀에 합류했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 아즈테카스는 1976년과 1979년에 각각 조지 베스트와 요한 크루이프와 계약했다. 롤링 스톤스와 함께 여행하는 것 같다고 묘사한 코스모스의 원정 경기는 팀이 방문하는 각 경기장을 가득 채웠고,[40][15] 홈에서는 수많은 유명 인사가 팀을 응원했다.[40][15] 축구가 이전에는 미국 언론에 의해 거의 무시되었지만, 코스모스와 다른 NASL 팀은 이제 뒷면 페이지에 정기적으로 등장했다.[15]

그러나 펠레가 미국에서 축구 발전을 시작했듯이, 1977년 그의 은퇴는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15] 같은 위상의 인물이 이 스포츠를 대표하지 못하면서, 구축된 인기는 나타난 만큼 빠르게 급락했다.[15] ABC와의 리그 텔레비전 계약은 1980년 말에 상실되었고, 1984 시즌 전에 시행된 연봉 상한제[39]는 많은 해외 스타들이 유럽 및 남미 리그로 돌아가게 했다.[15] NASL은 1984년 말에 갑자기 붕괴되었고, 메이저 리그 사커의 1996년 첫 시즌까지 새로운 프로 축구 리그로 대체되지 않았다.[40]

코스모스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Once in a Lifetime: The Extraordinary Story of the New York Cosmos''가 2006년에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맷 딜런이 내레이션을 맡은 이 영화는 팀과 관련된 많은 선수 및 인물과의 인터뷰를 담고 있었다.[40][41][42]

아흐메트 에르테군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Average White Band와 애틀랜틱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들을 섭외하여 코스모스의 테마곡을 제작하게 했다. 그 결과, "The Cosmos Theme"은 밴드 멤버인 앨런 고리와 스티브 페론이 작곡했으며, "The Cosmic Highlanders"라는 가명으로 밴드가 녹음했다.[49]

코스모스는 가능한 한 광범위한 인구 통계에 어필하여 팬층을 극대화하려 했다. 이 팀이 사회적, 스포츠적 맥락에서 도시의 상류 사회와 연관되면서 미국과 해외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얻게 되었다.[40][15][45][56]

참조

[1] 웹사이트 New York Cosmos Heritage – December 10, 1970 – The New York Cosmos officially join NASL. http://nycosmos.com/[...] New York Cosmos 2011-09-30
[2] 뉴스 The New York Cosmos Celebrates its 40th Birthday http://www.nycosmos.[...] New York Cosmos 2011-02-05
[3] 뉴스 NO MORE KICKS FOR THE COSMOS https://vault.si.com[...] 2024-06-20
[4] 웹사이트 The New York Cosmos Want to Take the Field Agai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2011-04-15
[5] podcast When Stars Align: The Story of the New York Cosmos http://www.bbc.co.uk[...] BBC 2016-12-23
[6] 뉴스 New York Soccer Club is Nicknamed Cosmos https://timesmachine[...] 1971-02-05
[7] 문서 Newsham (2006). p. 22.
[8] 간행물 New York soccer club is nicknamed Cosmos 1971-02-05
[9] 뉴스 Gordon Bradley, Who Nurtured U.S. Soccer, Dies at 74 https://www.nytimes.[...] 2008-05-01
[10] 문서 The North American Soccer League operated a "points" system whereby a goal earned two points and an assist one.
[11] 웹사이트 Randy Horton http://youthandsport[...] Government of Bermuda
[12] 문서 Bradley became a citizen of the United States in 1974.
[13] 웹사이트 USA – Details of International Matches 1970–1979 https://www.rsssf.or[...]
[14] 웹사이트 Pele's legendary career told in numbers: Just how good was Brazil's emblematic forward? https://www.squawka.[...] squawka.com 2022-12-30
[15] 뉴스 When Pele and Cosmos were kings https://www.theguard[...] Guardian News & Media 2005-06-10
[16] 뉴스 Most in a poll found very proud of state https://www.nytimes.[...] 1977-10-29
[17] 뉴스 Julio Mazzei, Who Led Soccer's Cosmos, Is Dead at 78 https://www.nytimes.[...] 2009-05-14
[18] 서적 People's Diplomacy: How Americans and Chinese Transformed US-China Relations during the Cold War Cornell University Press 2024
[19] 뉴스 The first western club to tour China: New York Cosmos' 1977 adventure https://wildeastfoot[...] 2017-01-06
[20] 웹사이트 Soccer Hall of Fame Historian Allaway Pens Book on the New York Cosmos and Bethlehem Steel http://www.hofmag.co[...] Hall of Fame Network 2009-06-08
[21] 뉴스 Cosmos hire Klivecka as indoor coach https://www.nytimes.[...] 1984-12-11
[22] 뉴스 COSMOS FOLD INDOOR SQUAD https://www.nytimes.[...] 1985-02-23
[23] 웹사이트 The New York Cosmos Want to Take the Field Agai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2011-04-15
[24] 뉴스 COSMOS DROPPED BY N.A.S.L. https://www.nytimes.[...] 1985-03-14
[25] 뉴스 Cosmos Soccer Day Camp Mixes Summer and Sport https://www.nytimes.[...] 1993-08-07
[26] 뉴스 Fewer Kicks https://www.nytimes.[...] 1986-08-01
[27] 웹사이트 Cosmos Soccer Camps http://www.cosmoscam[...] Soccer Camps of America
[28] 웹사이트 Ramapo College Roadrunners – Men's Soccer History http://www.ramapoath[...] Ramapo College
[29] 뉴스 Red Bulls May Be Mix of Former Cosmos https://www.nytimes.[...] 2006-04-19
[30] 웹사이트 Cosmos' legacy yet to be fully embraced by MLS http://soccernet.esp[...] ESPN 2007-05-15
[31] 웹사이트 The Cosmos, For Free! http://www.thisisame[...] 2009-05-04
[32] 뉴스 Cosmos Begin Anew, With Eye Toward M.L.S https://www.nytimes.[...] 2010-08-01
[33] 뉴스 Eric Cantona's appointment at the New York Cosmos part of battle to restore football to heart of the Big Apple https://www.telegrap[...] 2011-01-19
[34] Tweet Does that mean he made right move saying no (to joining MLS)? Not really. Hell, several of Seamus' decisions at the LEAGUE level cost NASL. But back to the point – I can at the very least UNDERSTAND why he didnt want to give up his new purchase for a stake in a league rather than pour $ in club. 2019-06-05
[35] 웹사이트 New York Cosmos Returns to NASL http://nycosmos.com/[...] New York Cosmos 2012-07-12
[36] 뉴스 Report: New York Cosmos Plan to Make NASL Return in 2013 http://www.nesn.com/[...] New England Sports Network 2012-07-12
[37] 트윗 Thank you and stay safe, Cosmos Country.
[38] 웹사이트 NISA SPRING 2021: TEAMS RETURN, SAY GOODBYE AND HELLO https://www.soccerto[...] 2021-02-08
[39] 간행물 The NASL: It's Alive But On Death Row http://sportsillustr[...] 1984-05-07
[40] 웹사이트 When Soccer ruled the USA http://www.espn.com/[...] ESPN
[41] 뉴스 Cosmos shined brightly in soccer universe https://www.usatoday[...] 2006-07-06
[42] 뉴스 'Lifetime' exaggerates story of N.Y. Cosmos http://findarticles.[...] Deseret News Publishing Co 2006-08-18
[43] 서적 Toye 2006
[44] 웹사이트 Once n A Lifetime (The Extraordinary Story Of The New York Cosmos) https://www.youtube.[...] Miramax Films – YouTube
[45] 웹사이트 New York Cosmos: A Conversation With The Artist Behind The Logo http://latinosports.[...] Latino Sports Ventures 2011-02-16
[46] 웹사이트 New York Cosmos kit history at New York Cosmos Jersey Collection https://www.nycosmos[...]
[47] 웹사이트 New York Cosmos kit history at NASL Jerseys http://www.nasljerse[...]
[48] 웹사이트 Admiral Official Website https://admiral-spor[...]
[49] 웹사이트 EPISODE 146: The NY Cosmos Theme Song – With Musician Steve Ferrone https://goodseatssti[...] "Good Seats Still Available" podcast 2020-01-11
[50] 웹사이트 North American Soccer League https://www.rsssf.or[...]
[51] 웹사이트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 http://bleacherrepor[...] Bleacher Report
[52] 뉴스 Built for Speed, And Local Pride; Track Stadium Emerges On Randalls Island https://www.nytimes.[...] 2004-08-20
[53] 웹사이트 The Yankee Stadium Redevelopment Project http://www.nycgovpar[...]
[54] 뉴스 As Stadiums Vanish, Their Debt Lives On https://www.nytimes.[...] 2010-09-07
[55] 웹사이트 Hartford Shift Seen For Indoor Cosmos https://www.nytimes.[...] 1984-03-08
[56] 웹사이트 New York Cosmos: A Conversation with the Former Team Doctor http://latinosports.[...] Latino Sports Ventures 2011-03-08
[57] 웹사이트 Pinup Goalie: Shep Messing http://nymag.com/mov[...] New York Movies
[58] 학술지 An All-star effort Tribune Company 1984-02-09
[59] 웹사이트 NASL All-Star teams, all-time http://homepages.sov[...]
[60] 웹사이트 John Kerr http://www.canadasoc[...] CanadaSoccer.com
[61] 웹사이트 Heritage http://nycosmos.com/[...] New York Cosmos
[62] 뉴스 From Cape Town to NY, via Charlton: the footballing life of Eddie Firmani https://www.theguard[...] Guardian News & Media 2010-05-19
[63] 뉴스 Cosmos to Retain Mazzei https://www.nytimes.[...] 1983-02-01
[64] 웹사이트 American Soccer History Archives http://homepages.sov[...]
[65] 웹사이트 When The Cosmos Came To Town http://www.ozfootbal[...]
[66] 웹사이트 The day Greece faced NY Cosmos https://www.thenatio[...] National Herald
[67] 뉴스 세계적 프로축구팀 코스모스 서울에 온다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9-09-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